서울총장포럼

대학격차의 비애

소득 격차의 문제는 도처에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같은 인간이지만 같은 인간이 아니고, 같은 사회이지만 같은 사회가 아니다. 주인 몇 명과 노예 수천이 존재했던 전근대의 어느 사회가 다시 그 고개를 여기저기 내밀고 있다. 어떤 사회에서는 빈부격차의 비극이 이제는 대학에서도 그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지난 4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대학에 초청강연을 갔을 때의 일이다. 아침에 숙소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신문을 펴드니, 신문 일면의 한 구석에 흥미를 끄는 기사가 있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가려는 한 인사가 출마 동기에 대해 말했다. 미국사회는 이제는 ‘억만장자’와 ‘가난한 자’ 두 그룹만이 존재하게 됐는데, 이를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공화당의 상원의원이 빈부격차를 이야기하다니, 신기하고 놀라왔다.


그 날 강연을 마치고 청중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하는 한 노신사의 서두발언이 가슴을 때렸다. 그는 말했다. 지금 미국사회에는 ‘억만장자’와 ‘가난한 자’ 두 집단 밖에 없다고. 그 다음 날 아침을 먹으며 펴든 신문에도 비슷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지역신문인데,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대학에 관한 기사였다. 거기에도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미국의 대학은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소수의 ‘억만장자 대학들’이고, 다른 하나는 다수의 ‘가난한 대학들’이라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이틀 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우한 이들 경험들은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공황과 호텔을 오가며 스친 시내의 길가는 무언가 모르게 예전보다 황량하게 느껴졌다. 고급 호텔을 한 블럭 지나니 건너편에는 노숙자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고, 거리는 칙칙하고 음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십여 차례 갔는데, 올해의 경험은 특히나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위대한’ 미국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대학의 빈부격차는 사회의 빈부격차를 그대로 반영한다. 대학도 그 사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학 간의 빈부격차가 역으로 사회의 빈부격차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데 있다. 사회의 특정 소수만 특권을 누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한 사회가 행복한 사회이겠는가. 정의가 사라져가는 사회는 빈부의 격차로 흉측한 모습을 드러낸다.


각 나라의 대학의 존재양상을 보면 그 사회의 건강상태를 알 수가 있다. 대학은 미래를 짊어질 우리 모두의 젊은 세대를 길러내는 곳이다. 사회전체의 행복과 활기를 위해 대학이 존재하는 것이지, 만약 대학이 서쪽 구석에 혹은 남쪽 구석에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소수자의 특권과 소수자의 영달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자.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각국은 국민이 바치는 제한된 세금재원을 대학교육을 위해 어떻게 활용하고 분배할 것인가에 골머리를 앓고 지혜를 짜낸다.


장래에 다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자는 능력 있는 소수이므로, 현재는 그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면서 그러한 예는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全無하다.


가장 행복하게 산다는 나라들의 대학교육이 어떠한가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행복한 사회의 평범한 대학들은 이른바 대학랭킹에 깊이 병든 자들에게는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서다.



허남린 논설위원/브리티시-콜럼비아대·아시아학과

기사출처_ 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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